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3일

즐거운길 2021. 2. 25. 22:21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I)

 

요한복음 13 장 2 절, 마가복음 14 장 3-9 절

 

 

[요한복음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마가복음 14:3-9]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3 장 2 절’에서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4 장은 유다가 결정적으로 어디에서 빗나갔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막 14: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식사를 하셨는데, 장소는 ‘베다니’이고 그 집은 문둥이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문둥이는 격리되어야 하는 자입니다. 문둥이와 결코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날 수도 없고, 더구나 식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식사를 하시러 오셨습니다. 문둥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이 위대한 사건이 일어난 다음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문둥이의 이름이 시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이름입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도 시몬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수장이었던 베드로의 원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문둥병에 걸렸다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주께서 오신 곳이 문둥이의 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14:3). 마태도 문둥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마 26:6). 초대교회 안에, 사도들 안에 위대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문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할지라도,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더 크게 증거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문둥이는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런 자를 찾아가셔서 함께 식사하시며 놀라운 사랑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그는 치유를 받았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맛보고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집에 와서 식사를 할 때 한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마가는 이 여자가 누구라고 적어놓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이 여자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 장 1, 3 절을 봅시다. 


[요 12:1, 3]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여기 그녀의 이름을 “마리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마가복음으로 돌아갑시다.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나드는 식물에서 추출한 최고의 향유입니다. 여인이 그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막 14:4-5]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여인의 예수님을 향한 위대한 사랑이 드러났는데, 어떤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분을 내었습니다. 


마태복음 26 장 7-9 절에서는 ‘이 사람들’이라는 말 대신에 ‘제자들’이라고 정확히 기록을 해놓았습니다. 
[마 26:7-9]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9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하거늘.
이 말씀을 깊이 보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7 장 37-38 절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눅 7:37-38]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죄인 하나가 와서 울면서 옥합을 깨고 그것을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고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일에 대해서 누가가 가장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귀한 사랑의 행위를 보고 어떤 사람들이 분을 냈습니다. 그것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귀한 향유를 허비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향유가 굉장히 비싼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었는데, 3백 데나리온이라면 일 년치의 품삯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뜨려 주님께 드리는 것이 너무나 아깝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인이 주님께 그런 사랑을 돌려드리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고 분을 냈습니다. 


한 여인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을 깊이 파고 들어가 봅시다.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었던 사건이란 

무엇입니까? 왜 마가는 이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시몬이 자신을 치유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잔치에 초대했을 것입니다. 
옛날 동양에서 아주 신분이 높은 사람이 그릇을 쓰면, 신분이 낮은 사람이 그 그릇을 쓰지 못하도록 그릇을 깨뜨려서 버렸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이런 문화가 있었습니다. 옥합은 옥으로 만든 뚜껑이 있는 작은 그릇인데, 그 안에 귀한 것을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꺼낼 때에는 그릇을 깨뜨렸습니다. 여인의 옥합에는 향유가 있었습니다. 

향유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잘 씻고 난 후에 마지막에 발라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향유를 영원한 세계에 같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은 것은 주님을 향한 여인의 깊고도 깊은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이 여인은 가장 귀한 것을 가장 귀한 분에게 드렸습니다. 


누가복음 7 장 38 절에 보면 ‘울며’ 라고 했습니다. 울며 그것을 드렸습니다.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이 사건 이후에는 유다의 배반이 따라 붙어 있습니다. 여인이 주님을 향해 드러낸 사랑을 보고 유다는 심각한 시험에 든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유다는 큰 충격을 받고 사단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복음서의 기자들에게는 이것이 매우 충격적이고 중요한 기사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드러나는 곳에서, 또한 사단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오해하면 사단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모든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인과 제자들의 마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여인은 매우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허비로 보였습니다. 여인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한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님이 집에 방문하면 발을 씻어주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의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식사할 때 향유를 조금 뿌렸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향유를 머리에 흘러 넘치도록 부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깨뜨려서 주께 드렸습니다. 아무리 주고 주어도, 나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여인을 통해서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분노했습니다. 그 사랑을 허비이며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 14:9)”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향해서 베푸신 사랑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인이 보여준 그 사랑이 바로 주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가르치는 바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를 온 천하에 들려주고 기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녀가 보여준 사랑의 행위는 조건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