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4일

즐거운길 2021. 2. 25. 22:35

[4 일]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II)

 

 

요한복음 13 장 2 절, 마가복음 14 장 3-9 절

 

 

그런데 주님과 함께 살았던,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던 제자들은 여인의 사랑의 행위를 어떻게 보았습니까?  그들이 사랑을 보는 눈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막 14:4-5) 라고 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가난한 자는 항상 함께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신 15:11).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막 14:7)고 하셨습니다. 


여인이 드러낸 사랑은 순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매우 계산적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계산적이 되고 따지기 시작합니다. 진정한 사랑에 빠져 보십시오. 사랑에 빠진 자는 무모합니다. 앞뒤를 따지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고 허비로 여겨질 정도로 주고 또 줍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랑의 행위가 계산적이 될 때,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5 장에는 3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공통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를 분석하고 따지기 시작하면, 그것은 정말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섭니다. 한 마리가 아흔 아홉 마리보다 더 귀하단 말입니까? 한 마리를 버려두고 아흔 아홉 마리를 돌보고 지극한 정성과 관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매우 어처구니없고 이성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단호하게 하나가 아흔 아홉 보다 더 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 명 한 명의 영혼이 모두 천하 보다 귀한 것입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를 보면, 여인이 은전을 하나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 찾고 난 후에 기뻐서 잔치를 합니다. 드라크마 하나를 찾은 것보다 잔치비용이 더 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가 찾아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양에 대한 관심, 소외된 자를 향한 관심,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안에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비는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큰 문제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침륜에 빠지고 버림받고 소외된 자, 사망의 그늘에 있는 자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먼저 건져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은 정말 총명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신이 아니라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의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고전 1:25)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가 똑똑해지려고 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제자들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들은 한없이 똑똑하고 계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의 사랑의 행위를 아름답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무가치한 허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감동은 더 큰 감동을 낳게 됩니다. 


눈물은 더 큰 눈물을 쏟게 합니다. 어떤 이가 자신이 체험했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감동을 받게 되고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여인의 사랑의 행위는 매우 감동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 주님과 가깝게 있었던 자들이 왜 주님에게 진정한 사랑을 드러내는 자들을 보고 그것을 오해하고 분노한 것입니까? 그들은 사랑을 사랑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똑똑하고 계산적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사랑을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주께서 보시는 초점은 향유 옥합이 아니라, 주님께 무조건적으로 아낌없이 모든 것을 드린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것을 귀하고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 대한 말씀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을 향해서 분노했던 자들이 마태복음에는 제자들, 마가복음에는 어떤 사람들, 누가복음에는 바리새인, 요한복음에서는 ‘유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가르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인의 사랑이 보이지 않고 향유 옥합의 가격이 보였습니다. “저 값비싼 것을 버리다니. 가격으로 따지면 3 백 데나리온은 될텐데. 저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것 같이 말했지만,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랑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자였습니다.


향유는 식사를 할 때 조금 뿌려주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일상적으로 향유를 조금 뿌렸습니다. 그렇게 해도 충분한 것인데, 그것을 다 깨서 아낌없이 붓는 것이 너무나 아깝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허비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이 매우 실용적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눈부신 여인의 사랑의 행위를 칭찬하시는데, 여인 안에 있는 진정한 사랑의 귀함을 주목하고 계신데, 제자들은 그것을 돈으로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식어질 때, 사랑이 사라질 때,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심지어 유다는 그 사랑의 행위를 보고, 주님을 지극히 높이고 사랑하는 그 여인을 보고 마음이 뒤틀려 결국은 배반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주께서 다른 이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는 것을 아름답게 보지 못하고 오히려 싫어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드러내며 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께서 베푸신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허비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소유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문둥이 시몬의 집을 찾아간 것, 그 문둥병자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품고 치유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랑의 허비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모든 것이 사랑이었습니다. 당신의 피까지 아낌없이 흘리셨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3 장 1 절에서 주께서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까지 누가 크냐며 서로 다투었던 제자들의 어리석고 미련한 모습을 볼 때, 어찌 보면 주님의 사랑이 쓸모없는,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는 사랑처럼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주님은 끝까지 아낌없이, 죽기까지 제자들에게 사랑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허비라고 생각될 정도로 주님은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이 사랑 안에 거해야 됐을 제자들인데, 제자들에게는 이 사랑에 대한 깊은 묵상과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받고 있는 놀라운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놓치고 잃어버릴 때 우리가 쉽게 제자들처럼 변화됩니다. 모든 것이 계산적이고 실용적으로 변화됩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실용적인 것, 계산적인 것을 멀리 하자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서는 계산적, 실용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는 무모합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면 계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인의 사랑의 행위로 인해 깊은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여인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모두 드렸습니다.

 

조그마한 것으로도 충분했지만 여인은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보시고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 14:8)고 하셨습니다. 장사를 예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사 지낼 때, 가장 귀한 것을 드립니다. 이제 마지막이기에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장사를 예비한다는 말씀 안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삶의 모든 것이 종국에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종국은 십자가입니다. 죽음입니다. 자신의 소유의 모든 것을, 심지어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무모한 사랑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리스도의 희생은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 문둥이 시몬을 향한 사랑,  죄인을 향한 사랑은 생명을 다한,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물고기가 자신을 조금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새끼를 혼신의 힘을 다해 키우고 결국에 자신은 죽는 것처럼, 부모가 죽을 각오로 자식을 키우고 희생하다 죽는 것처럼, 주님께서 그런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까? 여인은 주님의 자신을 향한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주님께 돌려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여인과 같이 사랑을 받은 만큼 주님께 사랑을 돌려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생명을 다해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생명을 다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 생명까지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 14:9)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타산적인 제자들이 되지 말고,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의 이야기가 주님 앞에 나가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