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5일

즐거운길 2021. 3. 5. 11:02

 

 

[5일]
유다의 배반 (I)

 

마태복음26-27장

 

[마 26:6-9]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본문에서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넘긴 사건의 앞에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으로 인해 분해하는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제자들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이들의 자세가 어떠합니까? 매우 정의롭습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에게 “옥합을 왜 허비하느냐?"라고 책망했던 제자들 안에 있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이해했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사랑의 깊은 세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정의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깊은 사랑의 세계가 열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이 여인의 일이 전파되리라"(마 26:13)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행위는 가장 귀한 것을 깨어서, 자신을 비우시고 생명까지 내어 놓으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던 주님의 삶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제자들에게 증거하셨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가르치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 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이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한 가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란 어처구니 없는 것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성적인 판단과 계산으로 열려지지 않는 세계입니다. 어떻게 한 마리의 양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 보다 더 귀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한 드라크마를 찾았다고 자신이 찾은 돈보다 더 많은 돈이 소요되는 잔치를 벌일 수 있습니까?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왜 집안을 지켰던 맏아들보다 집을 떠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허랑방탕 했던 둘째 아들을 위해서 더 큰 잔치를 벌입니까?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큰 자비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는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안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위대한 사랑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더 나아가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유다가 그리스도를 반역하는 장면에서부터 고난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사랑의 가르침을 배우고, 또한 넘치는 사랑 속에서 살았던 제자가 그 스승을 오히려 팔았습니다. 이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정말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람을 팔아 넘긴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스승을 배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입니까? 왜 유다는 주님을 팔았을까요? 무엇이 이런 비극의 역사를 만든 것입니까? 그는 왜 주님을 팔겠다는 그런 끔찍한 판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까?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퍼부어서 가르치고 길렀던 제자인데, 그 제자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자신의 스승을 팔 때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안에 분명하고 확고한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14절을 봅시다.

 

 

[마 26:14]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한 제자의 반역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슬픈 비극의 이야기의 시작은 그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대제사장에게 간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무엇을 말했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마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본문에서 ‘내가’ 누구입니까? 유다입니다. 유대민족이라고 할 때 바로 그 유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지탱케 한 가장 위대한 지파가 유다지파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 전승을 굳게 붙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성전 건축에 앞장섰던 지파가 유다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를 판 유다가 어떤 계보에 속했든지 그 이름이 유다입니다. 가룟 지방의 유다입니다.

 

유다는 말할 수 없이 큰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얼마나 믿고 신임했던지 돈 궤를 맡기셨습니다(요12:6). 우리가 누구에게 돈을 맡깁니까? 가장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누가 집에서 살림을 합니까? 집을 가장 잘 돌볼 사람입니다. 아무에게나 살림을 맡기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를 누구보다 더 믿으셨고 더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를 키우셨고 매우 귀한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어떤 자는 “왜 배반할 유다에게 주님께서 돈을 맡기셨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결코 배반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절대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키우셨겠습니까? 오직 사랑으로, 오직 절대 믿음으로 키우셨습니다. 요한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믿었습니다.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분명히 돈을 맡길만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유다가 배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가 반드시 변화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고 믿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 안에 배반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극을 보십시오. 이 충격적인 사실을 보십시오. 그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삼십을 달아 주거늘 (마 26:15).”

 

이것은 매우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그토록 사랑했던 제자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내가 그를 팔 테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시대에는 흔히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 시장이 있어서 돈을 받고 노예를 팔았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마치 노예처럼 당신께서 지극히 사랑하셨던 한 제자에 의해서 팔려가는 순간입니다. “얼마나 주려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제사장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은 삼십입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노예처럼 얼마에 팔렸습니까? 은 이십이었습니다. 은 이십에 의해서 팔려갔던 말할 수 없이 슬프고 비극적인 요셉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은 삼십에 팔리셨습니다. 은 삼십은 대단한 돈이 아닙니다. 그 돈으로 작은 밭을 하나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습니다.(마27:7) 오늘날로 보자면 몇 만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당시 모든 유대인 성인 남자가 내야 했던 성전세가 반 세겔이었습니다. 은 삼십은 30세겔 정도입니다. 얼마 되지 않은 가격입니다. 유다가 한 줌의 돈으로 예수님을 판 것입니다. 왜 그가 예수님을 팔았을까요? 왜 이렇게 끔찍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을까요?


마태는 이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 그리고 모든 복음서의 기자들은 이 사건의 전개에 있어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와 유다가 예수님을 판 사건을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가까이 있는 자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한 여자가 사랑을 알았습니다.

이 시대에 여자는 재산의 목록에 불과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정말 미천하고 죄 많은 여인이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눅7:37). 그런데 이 미천한 여인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온 생명을 바쳐서 증거하려 하셨던 하나님의 자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것입니까? 어리석음입니다.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어리석음입니다.

 

누가복음 15 장에는 매우 어리석은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해서 똑똑한 사람일수록 이 말씀이 더 이상하게 들립니다. 이상할 뿐만 아니라 불공평합니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침부터 종일토록 수고한 자와 나중에 온 자에게 동일한 품삯을 줍니다. 이것이 은총이고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자비를 보면서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음과 불공평, 그런데 사랑할수록 이렇게 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어리석어집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이유가 사라집니다.

 

 

 

 

사순절의 고난 기간을 묵상하면서 고난을 묵상해야 합니다. 특히 욥기를 깊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사단이 와서 욥을 참소합니다. “하나님,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없애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참소의 핵심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으셨을지 모릅니다. 사단의 기가 막힌 생각을 처음 들으셨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만약 우리에 대해서 따진다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사랑할 모습이 많겠습니까? 미워할 모습이 많겠습니까? 

 

이사야서 1장 18 절에서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변론하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들려지는 음성 속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불쌍한 영혼을 그렇게 대하셨고, 그들을 감싸고 품고 치유하셨습니다. 그 모습 속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와 조건이 없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이유가 사라집니다.

 

 


두 사람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삽니다. 둘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까? 아닙니다. 있습니다. 문제가 사라져서 관계가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가 안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문제가 그의 문제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문제가 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사랑을 보십시오. 말할 수 없는 희생입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그를 낳고 기르는 모든 것들이 희생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엄마는 아이가 똥을 싸도 그 똥에서 냄새가 안 납니다. 사랑의 힘이 이렇게 위대합니다. 그 사랑 안에는 어떠한 조건도 없습니다. 사랑이 깊어져서 그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그의 짐이 내 짐이 될 때, 그를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내어놓는 세계로
들어가면 모든 이유가 없어지고 말이 없어집니다. 


한 제자의 변질을 보십시오.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보았고 받았고 결국에는 제자로까지 세워졌지만 그는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받은 적이 없는 한 여인이, 불쌍한 죄인이 자신이 가진 귀한 것을 깨뜨려서 주님께 드렸던 위대한 사랑, 자기희생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주님을 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