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6일

즐거운길 2021. 3. 5. 11:18

 

[6일]
유다의 배반 (II)

 

마태복음26-27장

제자들 또한 분노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8절입니다.

 

[마 26:8]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라고 했습니다. 허비입니다. 분명한 허비입니다. 그것을 가져다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다면 가난한 자들이 더 배고픔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유다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했던 말이 아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돈궤를 맡아서 도둑질 했던 자라고 기록했습니다(요 12:6).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분노했습니까? 그것은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분노는 사랑을 보지 못한 데서 생긴 것입니다. 허비입니다. 사랑은 허비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면,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하는 우리의 삶이 때로는 허비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이 아깝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누가 아닌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분노했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사랑의 길을 갈 때 항상 파고드는 것이 세상적인 판단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를 주님에게서 돌아서게 하는 유혹은 무엇입니까?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고 세상적으로 똑똑해지는 것입니다. 유다가 진정으로 가난한 자를 염려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했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허비로 보았습니다. 그는 사랑의 깊은 세계를 알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 안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비정하게 팔아 넘겼습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가다가 우리가 언제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반했던 유다의 자리에 서게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오해할 때입니다. 그 사랑은 분명히 낭비입니다. 허비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허비입니다. 마르다가 밥상을 차렸습니다(눅10:40). 밥상을 차려야 우리가 그 밥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밥상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발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의 그 모습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허비와 같이 보이지만, 결코 허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제물은 봉사의 도구입니다. 더 큰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위험한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앙이 가장 좋은 사람을 그 자리에 세워놓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유다와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비난하고 낭비라고 생각하는 모습은 없습니까? 우리가 똑똑해져서 한 줌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헤아리려 한 적이 없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다 보면 비참한 것이 많습니다.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그것을 조롱합니다. 그것을 낭비라고 하고 허비라고 합니다.


세상적인 판단으로, 세상의 지식으로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의 세계를 재단하고 판단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아담은 이것을 믿고 순종했어야 했습니다. 무엇을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까? 지식의 나무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창 2:17). 인간이 가진 짧은 지식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지식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 지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판단하고 재단합니다. 그리고 비판합니다.


유다의 말이 얼마나 논리적입니까? 얼마나 근사한 말로 포장되어 있습니까? 여인이 깨뜨린 향유 옥합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옳았다는 판단 때문에 그는 주님을 노예와 같이 팔았습니다. 노예를 파는 가격도 되지 않을 은 삼십에 주님을 판 것입니다. 아주 작은 돈입니다. 하지만 그는 은 삼십에 팔 때 자기의 신념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자기 인생을 허비하게 하고, 또한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허비하게 함으로 영혼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허비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팔아 놓고 보니 오히려 그 사랑이 생각났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3절’을 보십시오. 

 

[마 27:1-3]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우리가 앞으로 이것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면, 신앙을 버리면, 주님을 팔고 나면 보이는 새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보이면 너무나 괴롭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모든 것이 다시 돌아옵니다.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지식의 열매를 따먹고 영악해져서 믿음의 아름다운 세계를 비판하지 마십시오. 떠나고 보면 그것이 잘못인 것을 알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그 사랑의 추억, 사랑의 능력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주님을 팔기 전에 스스로 똑똑하다고 하며 주님을 향한 비판적이고 도전적인 생각들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없애야겠다. 팔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팔고 보니 내면에서 “내가 옳지 않다. 큰 일을 저질렀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 허비와 같은 그 사랑이 있었기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탕자와 같이 집을 떠난 후에야 아비 집의 풍성함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대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우리가 유다의 뉘우침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돈을 갖고 대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4절을 봅시다.
[마 27: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악마적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마귀입니다. 지금 누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가를 잘 보아야 합니다. 유다 안에 사단이 들어갔다. 그런데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뉘우쳐서 주님을 팔아 넘기고 받은 돈을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그것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마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는 돈을 다시 가지고 가지 않고 성소에 던져 넣었습니다. “아, 이것이 나를 파괴한 것이었구나. 더러운 돈이로다. 나를 망하게 한 돈이로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돈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마십시오. 돈 때문에  아름다운 사랑의 역사를 훼손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팔지 마십시오. 유다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주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그 사랑의 능력과 사랑의 추억이 그를 견디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수까지도 품고 용서하시는 그 사랑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되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주님께서 그를 다시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다가 왜 사랑을 보지 못했는지를 깊이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기 전에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다와 같이 배반하지 아니하고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의 능력을 따라 제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