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길 7일

즐거운길 2021. 3. 5. 11:35

 

[7일]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I)

 

 

요한복음 13:2-10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매우 참혹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 원수가 함께 있었습니다. 원수가 함께 주님과 만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끝까지, 최후의 사랑을 주심으로 그를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비극의 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위기에 처하거나 불안이 닥쳐오게 될 때, 자신의 일에 갇히기 쉽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이를 돌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때가 이른 것을 아시고, 주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 죽음(死)은 죽음(死)이 아니라 죽임(殺)입니다. 이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죽임입니다.
주님께서 살해를 당하는 순간입니다. 비극의 극치에 지금 와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요한은 기록했습니다. 가슴 떨리는 이야기입니다. 

 

마귀가 시몬의 아들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주님과 제자를 갈라놓는 일, 이것은 마귀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 중에서 이 모반, 반란, 배반을 계획하는 것보다 더 성공적인 것은 없습니다. 또한 마귀가 획책하는, 마귀가 노리고 꾀하는 사악한 계획 중에서 이것보다 사악한 것이 없습니다. 믿는 자들이 항상 조심해야 할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과 가까이 있는 자들이 항상 경계해야 될 문제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나타나면 날수록, 주님의 그 사랑의 세계 속에 불신과 미움과 배반의 씨앗을 마귀가 뿌리려 합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고 살아야 합니다.

 

마귀가 유다에게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유다가 감히 주님을 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이 무서운 것입니다. 요한은 이것이 도저히 주님의 제자가 생각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옳은 기록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옳은 세계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까? 생각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런 잘못된 생각이 없습니까? 마귀가 뿌려놓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점검해야
할 기간이 바로 사순절 기간입니다.

 

최후의 만찬, 그 가운데 마귀가 벌써 들어간 유다가 있었습니다. 배반자가 그 가운데 끼어 있었습니다. 마귀가 벌써 그를 점령하고 들어갔습니다. 만찬의 자리에 들어올 수 없는 자가, 쫓겨나야 될 자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불경건과 우상숭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멀어질 때 인간이 빠지게 되는 죄의 근본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불의의 죄들, 수만 가지의 죄가 파생되어 나옵니다. 여기에 “내어버려두사"(롬 1:24,26 참고)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버림,내어버려두사, 유기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붙드심과 버림에는 너무나 큰 간격이 있습니다. 집이 있으면 집 안과 집 밖이 다른 것처럼, 문이 있으면 문 안에 있는 것과 문 밖에 있는 것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극으로 다가옵니까?

 

주께서 제자들을, 그리고 유다를 끝까지 붙드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끝까지,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내어버려진 자가 되었습니다. 내어버려짐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거부하고 유린하고 짓밟음으로 스스로 내어버려지는 것입니다. 요한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끝까지 붙들려고 하셨던 주님의 사랑을 요한은 그렸습니다.

 

요한은이 사랑의 놀라운 세계를 놓치지 않고 그리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원수가 있을 때 그 원수를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주께서 보여주셨던 것같이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배반자가 우리의 식탁에 함께 있으면서 떡을 나눈다 할지라도, 주께서 보여주셨던 것과 같이 그를 끝까지 사랑으로 붙드십시오. 주님을 팔 자가 만찬의 자리에 들어와 있는 너무나 심각한 장면에서도, 주님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매우 짧게 기록되어 있지만, 묵상하면 할수록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세계입니까?

 

이 만찬이 끝나고 나서 결국 유다는 떠났습니다. 30절에서 요한은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구절은 너무나 강렬하고 깊은, 그리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미지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최후의 만찬에 대한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 장면이 떠오릅니다. 누군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매우 여러 장으로 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말씀이고 장면입니다. 주님의 큰 사랑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끝내 돌이킬 수 없는 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밀고자, 배반자 유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고발하러 갔습니다. 왜 그는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고서도 깨닫지 못했을까요? 그로 인해 주님은 결국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유다와 같은 모습, 주님의 사랑의 깊은 세계를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 없습니까? 유다와 같이 그 사랑을 감사치 않고 오히려 오해하고 외면하는 모습은 없습니까?

 

그런데 유다가 나갈 때, 제자들 가운데 아무도 이 심각한 문제를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왜 나가는지, 그의 영혼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사랑에 둔감한 자들이었는지, 옆의 형제들에 대해서 무관심한 자들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제자들과 같은 무정함이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밀고해서 팔아 넘기기 위해 결국은 배반의 길을 간 유다 안에 있었던 그 깊고도 무서운 마음을 알지 못하고 태연하게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던 제자들의 모습은 너무나 몸서리칠 만큼 끔찍한 일입니다. 유다의 배반이라는 결과를 놓고 역광선으로 비추어 최후의 만찬의 자리를 보면, 주님 안에 있었던 처절한 고통과 놀라운 사랑, 그리고 제자들의 심각한 죄의 문제들이 낱낱이 고발됩니다. 떡을 떼어주시며 마지막까지 배반자 유다를 붙들고 권면하시는 것이 13장의 내용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다투고 있었고, 유다 안에 있는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를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식탁에 합당하지 않은 자가, 배반자가 들어와 있다 할지라도 그를 붙들고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주께서 다툼이 있는 그 상황에서, 그리고 배반자가 함께 있는 그 상황에서 보여주신 사랑의 행위, 섬김의 행위는 섬김 받으려 하며 다툼 속에 있는 제자들과
우리에게 역광선으로 너무나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벌써 유다에게 들어가고, 제자들이 다투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 조용히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으셨습니다.(요13:4-5) 다른 이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물을 담고 수건을 들고 서 있는 것이 예의였지만, 이 섬김의 모습, 종의 모습을 아무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마음을 제자들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고 하셨습니다.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기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낮아지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고 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처럼 서로의 발을 씻기는 자들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끝까지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절까지 40일의 기간을 우리가 가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우리를 붙드셨던 그 깊고도 깊은 세계를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의 삶이 우리의 죄를 찌르고, 우리의 무정하고 무자비한 삶에 도전이 되어야겠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고난을 앞두고 우리가 다른 이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너무나 처절한 죽음입니다.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은 비참한 길이 주님 앞에 놓여 있습니다. 짙은 어둠 속으로, 고난과 형극의 자리로 끌려가는 장면입니다. 

 

요한은 사랑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해석했지만, 실제로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참혹한 죽음입니다. 그것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으셨습니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메시지를 매우 강렬하고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전해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마음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만찬에 들어와 있는 자들이여, 13 장을 깊이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30 절을 오버랩 시켜서 생각해보십시오. 30절에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유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를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또한 유다를 돌이키지 못하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지 못하고 다투기만 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는지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유다를 돌려놓으시려 끝까지 붙드시고 끝까지 사랑하셨던 마지막 권면, 최후의 권면의 자리가 최후의 만찬의 자리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40일의 기간 동안 우리가 사순절 특별 메시지를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의 사랑과 그 삶이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로 임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고 죄에서 돌이키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로 내모는 자들이 아니라, 참된 사랑을 돌려드리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진정한 사랑, 진정한 섬김을 베풀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미워하는 자들, 원수와 같은 자들이 있습니까? 주께서 보여주셨던 것같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고 했던 그 깊고도 깊은 사랑의 진정한 세계를 드러내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닮아 그 사랑을 드러내며, 진정한 부활에 이르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요 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 죽음에서 초연해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요한은 지금 이 놀라운 세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주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자세가 주님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또한 이 상황에서 무엇을 행하셨습니까? 4-5절입니다.

 

 

[요 13:4-5]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유대인은 오늘 날의 샌들과 같은 것을 신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은 비포장 된 길이었기 때문에 비가 오는 때나 오지 않는 때나 길을 다니면 발이 먼지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대로 먼지가 많았고,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흙탕물에 빠져서 발이 더럽혀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집에서 물 항아리가 있어서
그곳에서 발을 간단하게 씻고 들어가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만찬의 자리, 마지막으로 주와 함께 만찬을 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누가는 22장에서 “제자들 안에 다툼이 일어났다”고 자세히 이 상황을 기록해놓았습니다. 주께서 잡혀서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 제자들 안에 “누가 더 높으냐?”라는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만찬을 나누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대야에 물을 담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보통 발을 씻기는 사람은 종이었습니다. 혹은 제자를 둔 랍비의 경우에는 제자가 랍비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것은 흔히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 중의 스승이신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