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8일

즐거운길 2021. 3. 5. 12:47

 

[8일]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II)

 

 

요한복음 13:2-10


[요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자 베드로가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물론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베드로의 반응이 더 놀라운 일입니다. 항상 주께서 그들의 발을 씻기는 삶을 사셨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은 언제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이 생기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행하셨던 이 사건 속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들이 자신들을 위한 지극한 사랑이요 섬김이었음을 제자들이 알고 살았어야 했는데, 베드로 안에 이 세계가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항상 그들의 발을 씻겼던 것을, 그들에게 행하신 모든 것이 사랑의 섬김이었던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알았더라면 “주여 어찌하여 주께서 제 발을 씻기시나이까?”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어찌하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7절을 봅시다.

 

[요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깊은 세계를 알아라. 너희 안에 있는 다툼의 근원을 아느냐?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낮아지고 섬김을 받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겨야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아직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안에는 베드로의 한계와 베드로를 향한 믿음과 소망,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이의 사랑의 종이 되기를 자처했던,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갔던 주님의 삶을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유는 사랑의 종 된 자유입니다. 주님은 사랑의 종이 됨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실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종이 되어 모든 이를 섬겼던, 주님의 놀라운 낮아지심과 비움과 희생의 삶을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요한은 이 말씀 속에서 진정한 권위와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주인은 주인이고 종은 종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인의 자리에 있는 자가 종의 자리에 서서 섬기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는 자가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가치관의 종말이라고 합니다. 천국에서는 지위와 권위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미 정해져 있거나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자가 섬김 받는 주인이 될 수 있고, 진정으로 낮아지는 자가 진정으로 높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권위를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계와 달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열려질 미래의 세계는,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보여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천국입니다. 사랑은 먼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고 먼저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사랑스러운 자녀를 섬김으로 기르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는 결코 아이 위에서 호령하고 지배하지 않습니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종이 되어서 그를 섬기는 자리에서부터 어머니의 역할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로부터 발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8절을 봅시다.

 

[요 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다”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향해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잔치에 갈 때 초대받은 자는 목욕을 하고 갔습니다. 이것이 팔레스타인의 풍습이었습니다. 잔칫집에 가는 자는 목욕을 하고 가는 것이 마땅히 지켜야 할 예절이었습니다. 이것은 천국의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잔칫집에 참여하러 길을 가는 도중에 발이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에 발은 씻어야 했습니다. 씻지 않으면 잔치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집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됩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말씀에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9-10절을 봅시다.

 

[요 13:9-10]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베드로는 갑자기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향해서 “이미 목욕한 자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목욕을 한다는 것은 중생을 의미합니다. 

중생의 체험이 중요합니다. 중생의 체험이 없는 자, 목욕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목욕을 해야 합니다. 신앙에서 거듭남의 체험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목욕이 필요합니다. 견신례가 필요합니다. 주를 믿는다 하지만, 진정으로 죽고 사는 체험이 있었습니까? 주님 앞에 진정한 믿음의 결단이 있었습니까?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진정으로 존재와 삶의 변화가 왔습니까? 

 

교회에서 세례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고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의 것과의 완전한 단절입니다. 그래서 죄의 모든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존재로 전환된 것입니다. 어떤 유대교 랍비는 세례를 받은 자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도 결혼할 수 있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 정도로 세례가 주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완전히 새 사람이 된 것 입니다. 세례는 완전한 영적 탄생, 새 사람으로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의식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성령의 세례입니다. 진리의 세례입니다. 진리로 인해서 근본적으로 죽고 다시 사는 체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의식적인 세례는 이것을 정확하게 외적으로 확증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성령의 세례, 진리의 세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의미는 중생한 자는 다시 중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의 중생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고 했을 때, 주님은 “너는 이미 씻김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먼저 큰 씻김이 있었습니다. 주의 씻김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리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잔치에 초대를 받은 자는 주의 씻김을 받은 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는데, 이 주님의 축복의 말씀을 기억하고 사십시오. 우리는 이미 씻김을 받아서 더러운 세상, 죄악의 세계로부터 건짐을 받은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발은 항상 먼지투성이입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할지라도 반드시 발을 씻어야 합니다. 발을 씻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얼마나 깊은 세계를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말씀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발은 죄 짓기에 빨라서 주님의 잔치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발을 씻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씻김은 정결례입니다. 씻김을 받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습니다. 불과 성령의 세례란 말씀의 세례, 진리의 세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15:3)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끗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그 안에 담긴 놀라운 은총과 사랑의 능력으로 깨끗함을 얻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죄에는 원죄와 자범죄가 있습니다. 깨끗해졌다고 하는 것은 원죄에 대한 부분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근본적인 원죄는 이미 깨끗해졌지만, 그런데 남겨진 것이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죄를 짓는 것을 즐겨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죄를 향하여 빠른 발로 인해서 우리가 더럽혀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씻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바울은 우리의 발이 죄를 짓기에 빠르다고 했습니다.

(롬3: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여전히 남아 있는 자범죄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끗하게 청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스스로 행했던 죄악은 끊임없이 씻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우리의 발이 씻겨지지 않고는 주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한 죄가 있다면 회개해야 하고, 또한 죄를 범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정결함을 받은 자들이지만, 끊임없이 우리가 범한 죄와 악행을 주님 앞에 들고 나와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정결례가 교회 안에서 항상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발을 씻기시는 것은 주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놀라운 섬김입니다. 우리는 항상 죄를 짓고 또 짓지만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발을 씻기시고 또 씻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끗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옷을 더럽히면 어머니가 옷을 빨고 또 빨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랑으로 아이는 깨끗한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주님의 낮아짐과 비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죄를 씻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 우리 안에 죄의 소욕이 사라집니다. 나의 발을 씻기시는 그 주님의 비움과 낮아짐, 섬김이 각인되면 삶의 전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죄 짓기에 빠른 발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겠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죄를 짓는데 길들여져 있습니다. 죄로 인해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죄를 짓기에 발이 빠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갈5:17)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체 안에 있는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는 죄의 소욕과 습관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죄덩어리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육체와 정과 욕심을 사순절 기간 동안 모두 십자가에 못 박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십자가가 걸려있는 곳에서는 교만이 싹틀 수 없습니다. 일체의 죄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정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가 사라질 때, 우리의 신앙이 병들게 됩니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죄적인 실존이 결코 청산될 수 없고 정, 욕심이 못 박히지 않고 죄가 그 안에서 활개치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교회 간판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간판이 없으면 안됩니다. 간판을 생명시 해야 합니다. 유월절에 문설주 위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놓은 것은 저주와 심판의 신이 그곳을 넘어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간판을 정확히 달아서 다른 공간과 구별된 곳,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어야 합니다. 간판이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 간판을 통해서 장소가 하나님에게 구별된 장소라는 정확한 정체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간판만 있다고 교회입니까? 교회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교회의 가장 중심에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나무 십자가만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에도 십자가가 달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라는 상징이 있는 곳은 자기 부정이 있는 곳이 됩니다. 그래서 죄가 살아남을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거리껴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살면 편한데, 그것을 부인하고 산다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거리끼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피해가려고 하는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할례와 같은 의식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할례 받은 기독교, 의식 중심의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우리는 항상 십자가 아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죄악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를 고발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를 고발합니다. 십자가는 죄악의 세계에서 사는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바울은 “너희가 너희의 육체와 너희의 정과 너희의 욕심을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부정의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의 아름다움입니다.

 

 

빌립보서 2 장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셔서 종의 형체를 띄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비워질 때 진정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낮아질 때 높아질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자기를 부정할 때 자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죽을 때 살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지극히 비우고 낮아지시는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죄 많은 우리의 발을 씻기고 또 씻기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지고 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분의 비움과 낮춤, 섬김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왕 중의 왕이시지만, 종 중의 종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형제의 발을 씻기고, 그의 죄를 용서하고, 지극한 사랑으로 섬기고 또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큰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13:10)고 하셨습니다. 목욕한 자는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고 발만 씻으면 되지만, 목욕하지 못한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그리스도의 만찬에 목욕도 하지 아니하고 참석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일방적인 은혜로 만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끝까지 그 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넘치는 은혜를 받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신이 죽고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세계가 열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놀라운 사랑 안에 있는 자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진정으로 진리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그를 위해서 낮아지셔서 섬기셨습니다. 그를 목욕시키기 위해, 그를 견신시키기 위해서, 그를 변화시키기 위해 배반의 그 자리에서까지 그를 사랑으로 섬기신 것입니다. 마귀가 들어가서 당신을 팔 생각을 하고 있는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신 이 놀라운 세계를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