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길 9일

즐거운길 2021. 3. 5. 19:33

 

[9일]


베드로와 유다의 대비: 중생 체험

요한복음 13장

 

요한복음 13 장에서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유다가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다시 돌아온 파란만장한 신앙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던 사람 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대조적으로 살펴 보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특히 나에게 유다와 같은 모습이 없는지 깊이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유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회개하고 돌아왔고 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둘의 근본적인 차이를 낳은 것은 무엇입니까? 목욕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입니다. 중생을 했느냐 하지 못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는 절대 주님이 자신을 씻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자 갑자기 자신의 몸도 씻겨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이미 목욕을 한 자는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고 발만 씻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목욕을 한 자였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그분의 놀라운 진리와 사랑의 능력으로 목욕을 한 자였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죽고 다시 산 자였습니다. 중생의 체험이 있었던 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배반했지만, 주님의 그 사랑을 잊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다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안에도 베드로처럼 수많은 약함과 허물이 있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보혈의 사랑으로 목욕을 함으로 죄를 씻고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를 저지르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큰 죄였습니다. 더군다나 베드로는 수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지만, 죄를 지었다면 그 이후에는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돌아와서 회개했지만 한 사람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였습니다. 자살했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자기가 돌아올 길을
완전히 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버렸습니다.

 

주님을 배신한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회개했지만 한 사람은 자살했습니다. 죄를 지은 후에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게 된 것입니까? 주님께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큰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그런 자를 향해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주님은 죄인까지도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를 원수처럼 생각하시고 다시 보지도 않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 안에 있는 깊은 마음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았지만, 유다는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영접했지만, 유다는 이 사랑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있었지만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와 의로움을 따라서 살았고, 따라서 자신이 행한 너무나 큰 죄를 생각할 때 다시 주님께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은 자신을 짓누르는 죄의 무게로 인해서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목욕한 자였습니다. 중생한 자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깊은 세계를 안 자는, 그 사랑으로 목욕한 자는 모든 죄로부터 깨끗해집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주님과 새로운 관계성 안에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모두 씻겨 졌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롬8:1), 어떤 것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자신을 끊을 수 없음을 압니다(롬8:31-39). 우리가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 중생하고서도 여전히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중생한 자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자들 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 체험입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분명한 중생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고 깨닫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의 장면입니다. 니고데모 안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중생해야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인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는 거듭남 입니다. 물로 씻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죄로 더럽혀진 우리의 몸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로 더럽혀진 몸을 목욕하듯이 물세례로 죄로 얼룩진 우리의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은 물세례를 의미하는데, 죄를 향한 진노와 심판을 가르치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전했던 메시지였습니다. (마 3:7-12)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몸으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지은 후에 반드시 엄중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물세례를 통해서 자신의 몸으로 매일 죄를 반복적으로 지으며 살아가는 자를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의를 위해서 살아가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세례입니다. 몸은 물로 씻을 수 있지만, 영혼은 물로 씻을 수 없습니다. 물세례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를 알게 될 때, 진리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갈 때 우리가 진정으로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진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죽고 다시 사는, 이전과 다른 새 사람이 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진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세계를 알게 되면 새로운 세계가 열려집니다. 

 

우리의 영혼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해야 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영혼으로 체험하게 되면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새 사람이 되는 놀라운 전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후에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세례, 진리의 세례를 받으면 진정으로 지혜로워져서 결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사단은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지혜롭지 않으면 그 유혹에 넘어 갈 수 있습니다. 사단은 죄를 범한 자에게 “네가 행한 죄를 보라. 너는 결코 주님께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참소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자는 죄를 지은 후에 쉽게 신앙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에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목욕을 해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중생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야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져야만 부활할 수 있습니다. 죽어짐이 없이 다시 사는 체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인해서 부활에 이른 삶이었습니다.

인간 안에 예수님과 달리 결코 죽어지지 않으려는 모습이 있습니다. 완고한 자신의 틀과 고집이 있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거짓된 자아를 깨뜨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옳고 의롭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전해주신 진리로 깨어지고 죽고 다시 사는 체험을 거부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죽어지는 것이 어리석은 것 같지만 가장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전 것이 죽지 않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분명한 거듭남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했습니다. 바울도 이전에 자신의 의에 도취되어, 그리고 무서우리만큼 완고한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살았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 앞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죽고 다시 사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거짓된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새로운 그리스도의 사랑의 진리가 살아나게 되는 체험, 이것이 진정한 중생입니다. 신앙의 길을 가면서 철저히 죽어지고 부셔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본체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비우고 낮추시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빌2:5-8).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신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죽이고 철저히 비우셨습니다.
죽음으로 인해서 다시 사신 분, 십자가로 인해 부활에 이르신 분, 그것이 예수님입니다. 베드로도 이런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철저하게 자신이 부서지고 새롭게 태어나는 중생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무너지기도 했지만, 결국은 위대한 예수님의 수제자로 남아지게 됐습니다. 목욕을 한 자는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고 발만 씻으면 됩니다.


그러나 유다는 죽고 다시 사는 중생의 체험이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부서지지 않는 자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여전히 변화되지 못하고 자기가 살아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사랑을 영혼에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안에도 여전히 죽어지지 않는 모습은 없습니까? 주님의 제자라고 하지만 여전히 유다와 같이 교만과 허구, 거짓에
둘러싸인 채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를 지은 후에 회개치 않고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고집을 꺾고 주님께 나아오는 자기 부정을 통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다를 향해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을 가졌다가 결국 되돌아서는 것, 그리고 자신이 가졌던 신앙을 저주하고
거부하는 것보다 슬픈 일이 없습니다. 성경은 승리의 교훈과 실패의 교훈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승리의 교훈을 잘 따라가야 하고, 실패의 교훈은 반면의 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유다와 같은 모습이 있다면 근본적으로 죽고 다시 사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