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11일

즐거운길 2021. 3. 9. 18:03

 

[11일]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요한복음 13:18-19

[요 13: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슬픈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는 성경의 말씀은 ‘시편 41편’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깊은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자면, 깊은 대화를 나누자면 먼저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당신이 처한 상황과 그로 인한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온전히 해석할 수 있을 때 우리가 주님의 깊은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가 만일 이 깊은 쓰라림의 세계를 알았더라면, 회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죄로부터 돌이켜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깊은 세계를 알지 못했습니다.

 

 

[시 41: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주께서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을 비우고 낮추셔서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빈약한 자를 권고한 것입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시편의 기자는 그의 권고로 인해서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건지기 위해 끝까지 권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권고하시며 시편 41편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 주님께서 깊은 사랑으로 그 배반자를 품고 계시는구나. 따뜻한 사랑의 권고를 통해 그를 재앙에서 건지려고 하시는구나.” 하는 이 세계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대하시는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시 41:2]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 소서.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라고 했던 시편 기자의 기도는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시 41:3]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여호와께서 깊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라 할지라도, 깊은 배반의 마음을 품고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자를 살리실 것입니다. 배반의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자신이 영적으로 너무나 깊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깊이 병들어 배반의 마음을 품고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살리실 능력이 주께 있습니다.


[시 41: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4절은 바로 유다의 기도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자신이 깊이 병들었음을 깨닫고, 그리고 이후에는 재앙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고, 주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고쳐주시기를 기도해야 했습니다.


[시 41:5-8]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6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7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주님을 욕했던 시대의 지도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저가 언제 죽어 기억에서 사라질까?”하며 악담하고, 겉으로는 다정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비방하는 말을 퍼트리고, 주님을 해하기 위해서 상상할 수 없이 악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 41:9]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9 절에 기록된 것처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떡을 나누었던 친구가 발꿈치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떡을 나누며 함께 식탁에서 교제했던 자가 발꿈치를 들고 간악한 자들의 계획에 동참한 것입니다. 발꿈치를 들었다는 표현이 매우 자극적으로 다가옵니다. 유다가 왜 떡을 나누던 식탁에서 일어나 발꿈치를 들어 분노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주님을 향한 포악한 횡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입니까?


“함께 떡을 나누던 자가 그 친구가 일어나 화를 냄은 어찜이뇨? 네가 화를 냄은 어찜이뇨?”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 “나와 함께 떡을 떼는 내 친구가 일어나서 어두움으로 나가는구나.”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밤에 자신을 떠나서 멀리 사라질 유다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유다 안에 주님을 향한 잘못된 분노, 울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다 아시고 그를 돌이키기 위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한편의 시는 너무나 깊은 세계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시편 41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경험했던 것을 기록한 시 중의 하나입니다. 가장 비극적인 장면을 그려놓은 시입니다. 그것을 지금 새로운 다윗, 새로운 왕이신 예수님께서 읽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이런 유다와 같은 마음 없습니까? 주님께서 떼어 주시는 사랑의 떡을 먹다가 발꿈치를 드는 일은 없습니까? 그런 마음이 들었던 적은 없었습니까? 이 유다는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유다에게 권면했겠습니까? 그러나 유다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은 자입니까? 주님께서 가지신 모든 것들을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돈궤를 맡기시며 큰 사랑과 믿음을 주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가 발뒤꿈치를 들게 된 것입니까? 주님 안에 유다를 향해 “네가 나의 친구가 아니냐? 어찌하여 네가 발꿈치를 드느냐? 네가 어찌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느냐? 말할 수 없는 횡포를 행하느냐?”라는 고통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만찬에 초대되었던 모든 사람은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가슴이 따뜻해졌을 것입니다. 떡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를 주시며 그들의 발까지 씻겨 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마음에는 따뜻한 사랑이 가득 담겨졌을 것입니다.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져 가는 정말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갑자기,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천둥이 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매우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가 지금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18절입니다. 갑작스러운 반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요 13:18-19]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18-19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유다의 마음을 알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알았더라면 전혀 다른 국면이 열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유다를 돌이키기 위해서 더 큰 사랑과 관심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안에서 형제자매들과 살 때, 영적으로 민감해야 합니다. 서로의 영혼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유다의 깊은 세계를 알지 못했습니다. 유다가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떤 마음으로 나갔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제자들이 얼마나 깊은 영적 침륜에 빠져 있었는지,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비극의 상황을 볼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 이셨습니다. 유다 안에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문제와,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생각할 때, 이것이 주님께 너무나 힘들고, 어떤 것보다도 쓰라린 십자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모든 고통의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