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12일

즐거운길 2021. 3. 10. 11:50

 

 


[12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I)

요한복음 13:20-30

 

 

[요 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영접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영접을 받아야 할 이가 직접 다른 이에게 영접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을 해야만 하는 단계까지 간다면, 그 관계는 정말 갈 데까지 간 것입니다. 주께서 지금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세계입니다. 이것보다 더 비참한 세계는없을 것입니다.

 

 

[요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예수께서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했다고 했습니다. 20절과 21절, 이 구절 사이에 큰 흐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까지 유다를 권고했습니다. 주님의 가장 옆에 앉혀서 그의 가슴을 향하여 진정 어린 권면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영접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음이 너무나 민망해졌습니다.


그가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사랑의 권면을 받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따뜻하게 사랑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참 슬픈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통을 깊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유다와 같은 완고함이 있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유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이 민망해졌습니다. 결국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13:21)고 하셨습니다.

 


제자들 중에 하나가 주님을 판다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매우 슬픈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능력이 무엇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세상의 어떤 권세나 죽음보다도 강한 것이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거부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고통입니다. 마귀가 그를 잡고 있습니다. 주님의 권면을 듣고 유다가 돌아섰어야 됐지만 그는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이 사랑의 권면을 받지 않았습니다. 고집스러운, 말할 수 없는 강팍함이 유다에게 있었습니다.

 


유다가 주님을 팔았지만, 베드로도 배반했다고 흔히 말합니다. 베드로는 회개했지만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둘의 차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배반의 이야기 결론은 은혜로운 메시지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베드로의 배반은 용서받을 수 있는데, 유다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너가서 정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의 배반은 근본적으로 너무나 다릅니다. 베드로의 배반이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일어났던 일이라면, 유다는 주님을 팔아 넘기기 위해서 배반했습니다. 그 안에 근본적으로 부서지지 않고 깨어지지 않은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죽고 다시 살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는 목욕하지 못한 자이자 중생하지 못한 자였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죄와 유다의 죄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둘의 죄의 차이를 우리가 꼭 깨달아야 합니다. 유다가 얼마나 끔찍한 못된 죄를 지었습니까? 유다에게서 우리는 뱀보다 흉칙한 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이야기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유대인의 대제사장에게 고해 바친 것은 무엇입니까? 대제사장에게 은밀하게 속삭인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심히 분노했습니다. 이것을 유다가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겁하고 간악한 일입니까? 다른 어떤 이가 아니라 가장 사랑을 받았던 제자가 이러한 일을 했다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주님의 제자였는데, 열두 제자 중의 한 명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스승을 배반할 수 있습니까? 그가 어떻게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후에 이렇게 배은망덕한 일을 행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유다를 제자로 선택한 것이 가상적인 선택입니까? 팔 것을 알고 뽑아놓은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다를 선택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절대예정입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떠난 것이고 스스로 주를 버린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배반은 베드로와 다른 것입니다. 20절과 21절로 쓰여져 있는 이 행간의 큰 변화를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권면, 사랑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다의 완고함이 우리 안에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마지막 경고와 마지막 초대를 거부하는 모습은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를 말이 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누구에게 배반의 씨앗이 싹트고 있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일이 모두 이루어지기 전에 미리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이 일이 일어난 후에 그들의 믿음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정으로 당신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자, 즉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도 영접할 수 있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하고 팔아 넘기는 일을 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는 의롭고 경건하다고 하겠지만, 그의 잘못된 신앙이 결국은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죄악의 결과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요 13: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제자들이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서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판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오늘날처럼 가운데 식탁을 놓고 의자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통나무 같은 긴 의자에 길고 둥그렇게 U자형이 되게 앉았습니다. U자형 의자의 가운데 주인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거의 누운 것 같은 자세로 식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앉으면 머리가 상대방의 오른쪽 가슴에 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오른쪽에는 요한을 앉히고, 왼쪽에는 유다를 앉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머리가 유다의 오른쪽 가슴에 가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른쪽에 앉았던 요한은 자신이 있었던 그 현장에서의 생생한 세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오른쪽 가슴에 요한의 머리가 가까이 있고, 주님의 머리는 유다의 가슴을 향하고 있는 것이 최후의 만찬의 장면입니다. 이것이 “누웠는지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요 13: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베드로는 너무 놀라서 요한에게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요 13: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요한이 조용한 소리로 “주여, 베드로가 묻나이다. 그가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보며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일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누구 이니이까?” 라는 물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끈질긴 사람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 곧 요한에게 머릿짓을 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 장면을 생각해보면,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그가 듣든지 듣지 아니하든지 마지막 사랑의 권면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섬김으로 말미암아 눈물과 감동이 있는 매우 따뜻하고 아름다운 식탁의 교제였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매우 긴장이 흐르는 그런 세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유다와의 관계에서만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둘만이 알고 있는 긴장된 감정의 세계가 있습니다. 둘만이 아는 이런 무서운 세계가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는 배반을 꿈꾸고 있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잉태되고 있는 배반의씨앗을 주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유다에게 권면은 하실 수 있지만, 그의 마음을 강제적으로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고통과 안타까움입니다. 주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끝까지 그를 사랑하며 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조정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은 우리 앞에서 매우 무기력하십니다. 결코 강제적으로 우리가 돌이키게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