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13일

즐거운길 2021. 3. 10. 12:15

 

[13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II)
요한복음 13:20-30

 

 

[요 13:26-2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떡을 떼어 주셨을 때, 유다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았어야 됐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주실 때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눅24:30-31). 그러나 그것이 유다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져 올 때, 그 자리가 떡을 떼어 주시는 자리와 같습니다. 어떤 면에 유다의 자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의 자리인지 모릅니다. 항상 우리에게 돌아서라고 하는 마지막 사랑의 권면이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한 유다가 누구인가라는 것이 항상 우리의 물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떡을 떼시고 유다에게 주시고 사랑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권면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향해서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 안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의 고통은 가슴이 터지는 고통입니다.

 


[요 13:28-29]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제자들 가운데 누구도 배반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마 알았더라면 따라가서 유다를 헤쳤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주님을 팔아 넘긴 자를 용서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결코 주님을 팔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그리고 있는 세계는 제자들도 누가 주님을 팔았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중에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홀로 끝까지 유다를 사랑으로 품으시며, 그의 죄와 씨름하시며 가장 가까운데 앉혀서 마지막 사랑의 권면을 하셨습니다.

 


[요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나가버렸습니다. 그 때가 밤이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의 권면을 외면하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사랑의 권면이 있었고 마지막에 주어졌던 기회였는데 그것을 놓쳐버렸습니다. 우리에게 동일한 모습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권면을 뿌리치고 발꿈치를 드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가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팔기 위해서 일어섰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유다를 사랑했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유다는 예수 공동체의 돈을 맡은 자였습니다. 
공동체에서 돈을 맡기는 사람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안에는 그것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돈은 깊은 신앙을 가진 자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가 돈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돈궤를 유다에게 맡겼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얼마나 믿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배반할 것을 아시고, 그를 유혹해서 결국은 넘어지게 하기 위해서 맡기신 것일까요? 돈으로 말미암아 분란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맡기셨을까요? 지극히 위험한 시각이고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것은 항상 사랑의 절대 예정 밖에 없습니다. 더 믿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돈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맡긴 것입니다. 왜 유다는 주님을 버렸을까요? 왜 버릴 사람을 주님은 믿으셨을까요? 이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이지만 우리는 너무 담백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다가 왜 무너지게 됐습니까?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있게 보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제자들은 가장 가까이서 가장 크고 깊고 놀라운 사랑을 받았지만, 풍성한 사랑의 말씀 속에서 살았지만, 오히려 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와서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런데 여인 안에 있었던 사랑을 보고, 유다는 “저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사랑의 깊은 세계를 깨달을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세상적이고 실용적으로 헤아리려고 하는 모습이 없습니까? 특히 돈을 맡은 자는 이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느새 우리 안에도 세상적인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사랑에 대해서 판단하려고 하는 모습이 없습니까? 유다 안에는 세속적인 시각이 깊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예수 공동체가 5천명까지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가 주님과 유월절을 앞두고 만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만찬이 최후의 만찬이 되고 만 것은 유다의 비극적인 배반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유다에게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작은 무리들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 요원한 세계, 환상(illusion)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전한 세속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주님께서 사랑의 진리를 따라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에는 너무나 한계적일 뿐 아니라 미련하고 어리석게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깨뜨려 깊은 사랑을 드리는 모습이 거리낌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릅니다.

 


유다는 주님께서 떼어 주시는 떡을 받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요한은 매우 깊이 있게 이 세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대제사장들에게 밀고하러 갔습니다. 그가 주님께서 주신 떡을 받고,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듣고 깊이 묵상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씀을 세상적인 시각으로 판단했습니다. 자신의 삐뚤어진 시각과 감정을 가지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말씀을 세상적인 시각으로 판단하는 모습이 없습니까? 세속에 물들어서 삐뚤어진 시각과 감정을 가지고 거룩한 것을 판단하려고 하는 모습은 없습니까?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고 의롭다는 생각은 없습니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청종하며 자신의 거짓되고 잘못된 모습을 심판 받고 새롭게 가야 합니다. 우리의 삐뚤어진 시각과 감정을 말씀을 통해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만찬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생명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전의 모든 잘못된 것을 고치고 버리고 돌아서라고 하는, 죽고 다시 살라고 하는 권면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받고 돌이키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철저히 이 사랑의 권면을 외면했습니다. 요한은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30)고 했습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 깊은 슬픔이 밀려옵니다. 제자들은 유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주님을 향한 몸서리가 처질만큼 무서운 배반의 마음과 생각을 다 헤아리고 있지 못했습니다. 유다가 나간 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입니까? 그리고 제자들 안에 얼마나 영적인 긴장성이 없습니까? 깊은 영적인 침륜이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가 나가는 것을 보고 무엇을 사러 나간 줄 알았습니다. 예수 공동체 안에 있었던 심각한 물질적 가난으로 인한 궁핍함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의 재리의 유혹으로 인해서 나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큰 이유 없이 공동체를 떠나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위기를 위기로 보지 못하는 위기, 이것보다 심각한 문제가 없습니다. 유다는 나갔습니다. 주님을 팔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많은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떠났구나. 공동체에서 나갔구나. 문제 많던 자가 나가고 이제 우리끼리 있으니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