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14일

즐거운길 2021. 3. 10. 12:40

 

[14일]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I)
요한복음 13장:31-38

 

 


유다의 배반으로 인해 주님께 죽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결정되는 순간입니다. 유다는 완전히 사단의 도구로 바뀌어져서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이제 날이 새면 예수님은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될 상황입니다. 유다가 떠남으로 죽음의 십자가가 다가오고 있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이 결정되어버렸습니다. 얼마나 심각한 순간입니까? 주님에게도 너무나 두렵고 가슴 떨리는 자리입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힘이 없습니다. 죽음이 주는 공포와 죽음이 주는 절망감이 있습니다. 죽음의 힘, 그것은 이 세상에 어떤
권세자의 능력을 합친다 할지라도 이길 수 없는 힘입니다. 모두가 그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힘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감미로운, 어떤 눈물 어린 위로로도 사람들 안에 있는 죽음의 공포를 덮을 수 없습니다. 가슴 떨리는 긴장의 순간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만찬의 밤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요 13: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1절은 주께서 유다가 떠난 이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13장의 이 순간부터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읽고 공부하게 될 부분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골고다에서의 죽음의 십자가, 그것보다 더 심각한 자리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십자가였을 것입니다. 영적인 십자가, 그곳에서 이미 십자가의 길은 결정됐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울며 통곡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 26:46)고 하시며 십자가의 길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유다가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 순간에 십자가는 이미 결정된 것이고, 죽음이 주님께 다가 오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죽음의 세력이 기다리고 있는 절망과 참혹한 위기의 순간에 여러분은 어떤 모습을 보이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요13:31)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고 했습니다. 


이 한 구절을 놓고 오래 오래, 깊이 깊이 묵상해보십시오. 정말 무섭고도 깊은 세계가 이 속에 있습니다. 어찌하여 죽음이 영광이 될 수 있습니까? 죽음은 패배, 실패가 아닙니까? 죽음은 절망이 아닙니까? 죽으면 아무것도 남아지지 않는 무(無, nothingness)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죽임이 영광입니까? 어찌하여 십자가가 영광입니까? 이 말씀 안에 주님의 놀라운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를 넘어선 부활, 그것을 볼 수 있는 힘은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의 유다의 배반은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는 요한복음 19장 30절의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결론입니다.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주님은 십자가는 영광이요 승리라는 사실에 대해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한 치도 옆으로 빠지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다 이루었다”는 말씀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아담으로 인해서 열린 불순종의 역사와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순종의 새로운 역사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 열린 사망의 역사와 다른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에 순종하셨습니다.

 

 

 

바울은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라Rejoice in Hope”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도의 길을 시작하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작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로 들어가는 순간, 이미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미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장차 확실하게 이루어질 부활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믿음대로 실현될 미래에 대한 소망 가운데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고 했습니다. 확신은 확실한 믿음, 확실한 신념입니다.

 


바울 안에도, 주님 안에도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패와 패배와 같은 그 자리에서 절대적으로 믿으셨습니다.

십자가가 영광이요 승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과 그 삶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흔들림이 있습니까? 모든 소망이 다 사라졌던 그 짙은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망의 빛을 보는 힘,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믿음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과정 가운데 여러분의 삶에 곤고함이 있다면,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가 시작되는 그 길에서 처음 하셨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인자는 영광을 얻었다. 고난이 영광이다. 희생이 영광이다. 십자가는 승리다.”고 외치셨던 주님의 모습을 닮아야겠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사랑의 길에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세계를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새기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요 13: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주님은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곧 주시리라”는 말 안에 주님의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 후에 하나님께서 곧 영광을 주실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이 길을 가셨습니다.

 


[요 13: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눈물 나는 순간입니다. 이제 헤어져야 될 때가 됐습니다. 말을 하려면 지금 해야 하고, 또 들으려면 지금 들어야 하는 때입니다. 주님께서 떠날 때가 가까웠습니다. 누구나가 마지막에는 심각한 이야기를 합니다. 유언은 가장 마지막의 말이기 때문에,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전하게 됩니다. 33절에서부터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기 전까지 남기신 말씀이 17장까지 연결됩니다. 고별의 설교와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권면하신 것입니다. 이별의 마지막에 주셨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고 하시면서 전해주셨던 마지막 권면을 우리가 주목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에게 던진 마지막 유언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을 새 계명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길,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며 영혼을 사랑했던 그 길입니다. 누구도 가지 못했던, 갈 수 없었던 이 길을 주께서는 지금 가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그 누구도 주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그 길을 따라오도록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제자의 여러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제자도에 관한 말씀을 배우면 여러 가지 제자가 가져야 할 조건을 알 수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이 있고, 또한 제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 속에 진정한 주님의 제자의 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깊이 보아야 할 순간입니다. 제자의 표지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힌두 여인을 만나면 그 사람이 인도 사람인지 아닌지를 당장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인도의 여인 임을 표시해주는 사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크교도는 터번을 두릅니다. 무슬림도 표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중도 그 표지가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깎습니다. 각각의 표지가 있습니다.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의 표지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세상이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됩니까? 세상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라고 증거하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 이것이 고별 설교의 시작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십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11번째, 12번째 계명을 주고 계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는 11번째 계명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마지막 계명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29)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레위기 19:18- 19절, 신명기 19:17,18절에 이미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율법을 통해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가르침 안에, 오경 안에 이미 다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께서 주시는 새로운 계명 속에서 반드시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유대인들도 사랑하라는 계명을 잊고 산 적이 없습니다. 유대교 랍비들은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매우 잘 알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오경을 다 외워야 바리새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으로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을 보지 못했고,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문자(Letters)가 되었습니다. 종이 위에 기록된 문자, 죽어버린 율법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3:18)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문자로만 기록되어진 사랑, 말과 혀로 만의 사랑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계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 자,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계명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위대한 것을 가르친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자신은 행하지 않으면서 남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매우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12번째 마지막 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바울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5:13-14)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 2:8)라고 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형제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이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운동력이 있고 약동하는 그런 생명의 법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