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15일

즐거운길 2021. 3. 10. 12:59

[15일]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II)
요한복음 13장:31-38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어떠합니까?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이 생명의 법이 우리를 자유케 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주었습니다(롬8:2). 이 사랑의 법으로 형제들을 자유케 해주고 생명의 삶으로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귀한 세계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했습니다. 그 사랑이 관념이 아니고, 모호하거나 막연하고 희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 바요, 들은 바요, 손으로 만진 바 된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고, 가슴에 넘치게 부은 바 된 것이고, 우리의 삶과 존재로 뚜렷하게 체험한 것입니다. 걸음마다 그분의 사랑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사랑을 따라 너희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던져진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향해 주신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났습니까?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 하는 자들 앞에서 주께서 땅에 두 번 쓰셨습니다. 새 법을 쓰신 것입니다. 돌 위에 새겨진 법, 고칠 수 없는 불문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돌 위에 새겨진 것보다 더 큰 이 땅 위에 새겨진, 우주의 근본이 되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주께서 쓰신 것입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또한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법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다른 말로 ‘정죄’와 ‘용서’라고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새 계명의 핵심이자 복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는 삶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깊은 사랑의 세계는 무엇입니까?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형제를 정죄하는 모습이 있습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께서 하셨던 사랑, 그리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죄를 주께서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요1:29)고 했습니다. 십자가란 그의 죄를 내가 담당한 것입니다. 정죄가 아닌 속죄입니다. 대속의 삶입니다. 대신 그 짐을 지는 삶입니다. 또 하나는 용서입니다.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지금 가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깊이 있게 보고, 또 보고, 또 보아야 합니다. 깊이 묵상해서 우리 안에 수육(육화)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정죄하지 않고 대속하는 삶과 용서하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관념이나 이론의 체계나 아름다운 설명이나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본 바, 들은 바, 손으로 만진 바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확증되어 열려지고 깨달아진 놀라운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만큼 애매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일까요? 기독교는 그것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용서’요 ‘대속’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지신 이 십자가의 길을 우리가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 (찬송가 519)”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진 것처럼 너희도 서로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라.’ 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고 했습니다. 짐을 지라는 것은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 3:14).”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 또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드러내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요13:36a)고 질문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눈물 나는 이야기입니다. “아, 네가 못 알아듣는구나. 그러나 네가 언젠가는 알아들을 거야. 깨달을 날이 있을 거야. 그리고 그 길을 따라오게 될 거야.”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베드로를 믿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 안에 여전히 십자가의 의미가 열려지지 않은 베드로로 인해 주님께서 겪으신 깊은 답답한 고통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잘 깨닫는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마지막에 가르치셨습니까?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 장에도 보면, 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주님의 말씀에 정말 검 두 자루를 가지고 왔던 베드로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눅22:36-38). 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생명과 같이 귀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희생해서 영적인 것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영적인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 정말 검을 가지고 왔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베드로의 질문 안에 동일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질문을 통해 베드로 안에 있는 깊은 영적인 방황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졸았습니다. 그는 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후에 고별의 설교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깊은 사랑의 권면을 받아들이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그것을 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가시는 길의 의미를 여전히 몰랐습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했지만, 그 길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과 마음으로 하나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물음 안에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일시적으로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반하며 떠나갔던 부끄럽고 못난 모습이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33절은 “이제 십자가의 길이 시작됐는데, 내가 십자가를 진 것처럼 너희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 와라. 그리하여 부활의 놀라운 능력을 맛봐라.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라. 그것이 너희가 갈 길이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전히 이 십자가의 길에 주님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의 말씀은 간단한 설교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특히 33-35절은 단순한 한두 마디의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질문은 한마디였을 것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것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비극과 고통, 눈물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 답답한 세계, 고통의 세계를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지만 마음이 통하지 않고, 당신과 하나 되지 못해서 홀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던 쓰라림이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것이 없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 그리고 변치 않고 그 길을 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 합니다. 지금은 이 세계를 못 알아들었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끝까지 믿음과 소망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야, 내가 가는 곳을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요 13:37-38]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누가복음에서는 이것을 더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눅 23:31-33]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베드로는 아직은 따라올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장담을 들으시고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38)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4절에서도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신앙의 길이란, 그것이 아무리 결의에 차고 용기 있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혀 가신 후에 대제사장의 뜰에 용감하게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결국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주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천박한 용기, 그리고 인간적인 결의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라는 죽음의 강을 흔들리지 않고 넘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무엇입니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무엇입니까? 정면 돌파해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주께서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는 힘, 죽음의 강을 넘어서 부활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그 힘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능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삶, 그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무엇으로 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적인 용기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삼각형과 같은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호언장담했지만 끝이 매우 작고 초라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간 길을 보십시오. 매우 작고 초라했지만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 극점이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영광입니다. 


나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자 절대적인 믿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놀라운 부활의 영광이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