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17일

즐거운길 2021. 3. 29. 19:00

 

겟세마네의 기도 / 그리스도와의 동행 (II)

 

마가복음 14 장 32-42 절

 


예루살렘 시내에는 올리브 나무를 심을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거름도 줄 수 없었습니다. 거름같은 더러운 것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올리브 나무를 키운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올리브 나무를 심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곳 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올리브 나무가 주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두번째는 영원성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성전이었고 하나는 감람산(올리벳) 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올리벳)에서 영원한 평화의 세계, 하나님 나라를 꿈꾸시며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겟세마네는 채유소라는 뜻입니다. 기름을 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에 많은 올리브 나무와 열매가 있어서, 그것을 겟세마네에서 짜서 기름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데,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왕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름을 부어 왕을 세웠습니다. 올리브 나무의 상징성은 매우 깊고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기름을 부어야 할, 그래서 그분을 왕으로 세워야 할 자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삶을 기억해보면, 주의 길을 곧게 할 자, 주님께 기름을 부어야 할 자가 누구였습니까? 말라기서 3 장, 4 장을 보면 주의 날이 오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런 사명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이 잘려서 헤롯의 접시에
담겨졌습니다.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 흘림이 있었습니까? 이렇게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 인해 이제 제자들이 주의 길을 예비하고, 주님께 기름을 부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Jesus as Christ 는 가장 간결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 이것이 지금은 하나의 단어가 되었지만, 이것이 하나의 단어가 되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두 단어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모든 사람들로부터 진정으로 그리스도로 기름부으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또한 주님을 진정으로 그리스도로 높이지 못하고, 그분께 기름을 부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그들에게 주님은 진정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역사에서 가정을 한다는 것이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지만, 감람산(올리벳)에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그리스도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면 어떠한 역사가 열려졌을까요? 어쨌든 감람산의 겟세마네의 그 자리는 예수가 그리스도로 나타나실 자리였습니다.  그리스도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어야 할 자리였습니다. 주께서 그리스도로 증거받아야 할 자리가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로 진정으로 증거받지 못하시고,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서라야 비로써 그리스도로 증거받게 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비극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눈물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주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마가는 그렇게 기록해놓았습니다. 

감람산 중에서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8 장에 보면 유다가 은 30 냥에 예수님을 팔 때, 그의 밀고를 듣고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자들이 그 겟세마네로 왔습니다. 유다도 그곳을 잘 알았습니다. 그들이 감람산으로 온 것으로 보아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와 쉬시고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 바로 이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막 14:32-33]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예수님은 이곳에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열 두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밤에 나갔습니다. 주님을 팔기 위해서 나갔습니다. 그래서 열 한 명이 남았습니다. 열 한 명 중에서도 “너희는 여기 있으라”고 하신 후에 세 명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함께 있었던 열 한 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공관복음의 마태, 마가, 누가가 모두 이 겟세마네의 기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최후의 기도에서 주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5 장 7 절’을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요한복음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이 부분을 마가복음을 통해서 다시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8 장부터는 본격적인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8 장에 예수님께서 잡히셨는데, 잡히시기전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던 세계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부분을 잘 읽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을 읽는 우리도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읽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안에 있는 말할 수 없는, 다시 보고 싶지도 않은 깊은 영적인 침륜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보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주께서 고통을 받으셨다는 것을 회상하기도 싫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사람들도 겟세마네의 기도에 대한 기록을 읽기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며 이것은 내 살과 피라고 하시며 이미 주께서 수난을 결심하셨는데,

또 다시 심히 놀라시며 슬퍼했던 주님 안에 이런 비참한 경지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결단을 하셨 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안에 있는 흔들림과 인간적인 나약함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요한은 주님 안에 고통과 슬픔이 있다는 것, 주님 안에 놀람이 있다는 것이 정말 상상하기도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 4 복음서인 요한복음 안에 담겨 있는 세계입니다. 요한복음 13 장에서 요한은 이미 주님께서 모든 것을 결심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한 치 없이 걸어가신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있었던 깊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기 위해서는 이 깊은 고난의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놀람과 슬픔, 눈물과 통곡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겟세마네는 채유소인데, 기름부음을 부음을 받으셔야 했던 왕의 수난, 왕의 고통과 눈물, 왕의 놀람과 슬픔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막 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주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직한 기록입니까?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갈 때,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어떤 고난도 없고, 항상 부활의 권능만 맛보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길과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부활의 그리스도의 역광선이 있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밝은 빛과 같습니다. 그 빛나는 빛에서 비춰보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가장 깊은 골짜기입니다. 
가장 어둡고 슬프고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그러나 깊은 골짜기를 아는 자만이 높은 봉우리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부활만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을 찬양하며 봉우리만을 쳐다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부활을 보기 전에 반드시 깊은 고난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출애굽기 12 장 9 절을 보면,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양을 먹을 때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먹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한 부분만 먹어서는 안 됩니다. 머리와 정강이, 내장, 즉 지정의의 모든 것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상한 사상, 윤리, 도덕적인 교훈들과 가르침들만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만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한 가지만 취해서 먹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을 먹을 때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것을 다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맞이하기 전에 무엇을 생각해야겠습니까? 영광스러운 봉우리의 이면에 있는, 그 뒷면에 있는 깊은 어둠의 골짜기를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