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18일

즐거운길 2021. 3. 29. 20:00

 

겟세마네의 기도 / 그리스도와의 동행 (III)

 

 

마가복음 14 장 32-42 절

 

 



‘마가복음 14 장 51-51 절’을 봅시다. 

[막 14:51-52]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위의 본문을 보면,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혔습니다. 그래서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한 청년이 누구일까요? 마가입니다. 본문은 마가의 자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이 열렸던 다락방은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마가의 집에서 만찬이 열린 것입니다. 마가의 집이 조금 부유했던 것 같습니다. - 예수님 제자 중에서 다락방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올리브 농장을 가진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사도행전 12 장에 베드로가 헤롯왕에게 잡혀갔다가 천사들이 나타나 옥문을 열어주어서 감옥에서 풀려났는데, 그가 감옥에서 돌아왔을 때, 로다가 나와서 베드로를 기쁨으로 맞이했습니다. 그 집이 바로 마가의 집이었습니다. 그 시대 하층에 있었던 이름도 없고 힘도 없고 가난했던 제자들 가운데서, 마가의 집은 좋은 형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집에 최후의 만찬이 있었는데, 요한복음 13 장을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사라졌습니다. 이제 죽음은 결정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감람산의 겟세마네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감람산의 겟세마네로 들어갔을 때, 아마 마가는 집에서 잠을 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때 유다와 일군의 무리들이 주님을 잡으려고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마가의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직 그 만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의 집에 왔는데, 주님은 벌써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주님은 그 시간에 세 제자를 데리시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유다는 만찬의 자리에 주님이 계시지 않자 주님이 계실만한 곳을 생각하고 겟세마네를 향해 갔을 것입니다. 마가는 그들이 나타났을 때, 두려움 속에서 아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자 “에라 모르겠다 나는 자자.  주께서 어디를 가시든, 무슨 일이 생기든…”이라고 하며 그냥 잤을 것입니다. 믿는 자들 안에 얼마나 이런 모습이 많습니까? 그는 주님으로부터 깊은 말씀을 배우고, 깊은 사랑을 받았던 자였습니다. 그의 영혼 안에 깊은 감화감동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신앙을 닮아서 그 안에도 신앙의 깊은 세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한 하늘의 별과 같이 숱한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유다가 나간 후에 고뇌에 찬 표정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을 때, 그는 홀로 집에서 편히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잡으려고 사람들이 들이닥쳤을 때도 “나는 모르겠다.”고 하며 잠을 잤습니다. 이것이 유다처럼 추악한 모습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잠을 자려고 하고 있는데, 도저히 자기 안에 있는 양심이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는 것입니다. ‘네가 주님의 놀라운 말씀을 배우고, 놀라운 사랑을 받고서도 어떻게 이렇게 잘 수 있느냐? 주님께서 위기에 처한 이런 상황에서도 네가 어떻게 이렇게 잘 수 있느냐?’하는 마음이 마가를 찔렀을 것입니다. 주께서 베푸신 지난날의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을 생각해보니 이렇게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사람들에게 잡혀가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가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예수님을 잡으러 갈 것이다. 이것을 빨리 가서 주님께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옷을 입을 겨를도 없이 홑이불을 두르고 뛰어갔습니다. 마가가 비겁했다가 다시 용감해졌습니다. 마가는 ‘주님을 구해야 한다.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달려갔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잡혀간다는 생각에 굉장히 큰 긴장이 마가에게 흘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보니 이미 예수님은 잡히셔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최후의 만찬 다음에 겟세마네의 기도가 빠졌는데, 요한복음 18 장을 보면 한 밤에 겟세마네의 기도가 끝난 후에 유다와 그 무리들이 주님께 왔습니다. 주께서 잡히셨던 잡히시고 수난을 당하셨던 그 날은 보름달(full moon)이 떠서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유월절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힘도 없고 한 번도 무력을 사용해본 적이 없는 예수님을 잡기 위해 유다와 무리들은 수많은 횃불, 칼과 몽치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보름달의 빛에 반사되어 칼과 몽치는 더 위협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위협적이고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주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잡아서 호위해서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는 용기를 내서 주님을 구하려고 하지 못하고 뒤에서 그들을 몰래 쫓아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주님을 잡을 수도 없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따라가다가 결국 무리들에 의해서 잡히고 말았습니다. 달이 훤히 떠있는 밤이고, 그들의 손에는 횃불이 있었기 때문에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는 마가가 매우 잘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가에게 “네가 누군데 따라오느냐?”고 했을 것입니다. 마가는 “홑이불을 뒤집어 쓴 너는 누구냐?”는 말을 듣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용감했던 마가가 다시 비겁해졌습니다. 마가는 항상 “나는 변치 않는 자가 되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는 자가 되겠습니다. 주님을 위해 저의 생명까지도 바치는 자가 되겠습니다.”라고 수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마음이 잡혀가는 주님 앞에 좀 더 다가갔을 때, 그가 용기를 내서 잡혀갈 주님의 마지막의 모습을 보려고 다가갔을 때, 결국 들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 홑이불 버려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1 장에서 제자들이 벗은 몸으로 있다가 옷을 입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벗은 몸으로 도망갔던 마가, 그리고 제자들의 모습과 매우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요 2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기록해놓았습니다. 자신이 쓴 복음서인데 빼놓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하나라도 감추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건만, 마가는 이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습니다. 이것이 정말 위대한 모습입니다. 

 


약한 모습, 초라한 모습, 비굴한 모습, 못난 모습,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버려두고 도망쳤던 모습, 이것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깊은 골짜기와 같습니다. 짙은 어둠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것을 다 드러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드러냄으로 이런 자신을 변화시키시고 놀라운 사랑을 베푸셨던 주님을 증거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골이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도리어 더 놀라운 산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골짜기를 통해 높은 산과 같은 주님을 나타내기를 원했습니다. 마가의 부끄러운 기록 속에서 마가의 놀라운 신앙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신앙의 모든 것들을 좋은 것으로만 치장하려고 하고, 좋은 것으로만 자랑하려고 하고, 좋은 것으로만 드러내고 남겨놓으려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의 시각, 그리고 그들에 의해 남겨진 진지하고 정직한 기록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마가의 위대함이 어디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마가는 너무나 비참하고 못난 제자들 모습이었는데, 이런 못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을 증거하기를 원했습니다. 

 


마가는 “저희는 십자가의 험한 그 길, 죽음의 그 길을 가는 주님께 한 마디의 위로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의 위로도 받지 못하시고 당신은 그렇게 그 길로 가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더라도, 그 약함을 통해서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서, 눈물과 통곡, 놀람과 슬픔속에서도 끝내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 안에 있었던 놀라운 용기, 그리고 그 결심을 꺾지 않으시고 변함없이 한 길로 가셨던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증거하기를 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