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21일

즐거운길 2021. 3. 29. 22:45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 잡히시다 (I)

 

요한복음 18:1-11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네 번째로, 가장 마지막에 쓰여진 성경입니다. 요한은 세 개의 복음서의 기록을 깊이 알고 있었고, 그 기록을 보고 요한복음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복음서가 던져주는 깊은 의미가 있지만,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8 장은 최후의 만찬과 고별의 기도 후에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장면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진정한 의미, 그리스도의 수난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시고, 고별의 기도를 통해서 기도하신 후에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임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기드론 골짜기를 지나 동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요 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18 장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라는 기록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은 고별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의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중요한 두 거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전이고 하나는 동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동산에 가서 또한 가르치셨습니다. 성전에서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이후에 동산에서 깊이 묵상하시면서 또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들, 그리스도의 제자들, 너무나 소중하고 아꼈던 제자들에게 풀어 주고 또 풀어 주셨습니다. 더 깊이 있게 성전에서 설교했던 말씀의 이면의 깊은 세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과 동산이 중요합니다. 

 

 

 

이 동산은 구체적으로 어떤 곳입니까? 감람원입니다. 올리브 동산입니다. 이곳에 우리가 잘 아는 채유소라는 뜻의 겟세마네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올리브 기름을 짜는 곳이었습니다. 겟세마네의 깊은 의미를 우리가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서의 기자들의 말씀에는, 특히 요한의 말씀에는 말씀 속에 깊은 상징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겟세마네였습니까? 왜 올리브 나무 동산이었습니까?

이것은 메시아의 영광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시야는 히브리어인데, 헬라어로는 크리스토스입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곳은 대관식의 한 자리가 되었어야 할 곳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아야 될 자리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 깊은 세계를 깨달았습니까? 

이 깊은 세계에 대해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누가 겟세마네에 담긴 이 세계의 깊은 의미를 알았을까요? 수난의 사건이 있기 전에 기름을 부었던, 옥합을 깨뜨렸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깊은 상징성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준비하지 못했었는데, 그 누구도 알지 못했었는데, 아주 가까이에서 아주 쉽게 아주 간단하게 기름 부을 수 있는 자들이 있었는데, 주께서는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한 여인의 기름 부음, 그 행위가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제자들이 써놓은 복음서 안에 이런 깊은 사연이 알알이 베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8 장 1 절에서 기드론 시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시내같은 것이 흘러서 기드론 시내를 거쳐 지나갔습니다. 지금 요한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왜 기드론 시내를 강조했을까요? 그리고 동산이 시내 저편이라는 것을 왜 강조했을까요? 성전에서 기드론 시내와  연결된 작은 시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기드론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되면, 양을 잡아 성전에서 피를 뿌리는데 너무나 많은 양들을 잡아서 뿌렸기 때문에 성전에서 기드론 시내로 흐르는 작은 내가 흥건히 피로 물들어서 작은 피의 강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자들에게 죽음의 신이 넘어갔던 것을 기념해서 지켰던 유대인들의 절기였습니다. 이 유월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당시에 약 이백 만명이 모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한 가족에 한 명씩 양을 잡아도 약 20 만 마리의 양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 피를 성전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매우 높은 곳에 있었던 성전에서 뿌려진 그 피는 기드론 골짜기의 시내로 흘러 내렸습니다. 그러면 시내가 피의 강이 되었습니다. 물은 없고 온통 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물이 다 피로 범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강을 주께서 건너서 겟세마네동산으로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왜 요한은 요한복음 13 장과 18 장 사이에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기록한 겟세마네의 기도를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요한복음 13 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는 이미 요한복음 13 장 속에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기도 이전에 이미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 안에 큰 결단이 있었습니다. 다른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서 “일어나 함께 가자”(마 26:46; 막 14:42)라고 하시며 십자가를 지실 것을 결의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은 13 장의 최후의 만찬에서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의하셨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요 13:30-33]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십자가가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극의 자리에서 더 큰 사랑의 역사가 드러날 수 있음을 굳게 붙드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의 그 길을 가시기로 결의하셨습니다. 

 

 

[요 18: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그런데 요한은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모이셨던 곳이었습니다. 유다도 그곳에 있었던 자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삶을 나누었던 자입니다. 깊은 세계의 말씀을 들었던 자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권면과 그 가르침을 배웠던 자입니다.

 

 


[요 18: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어쨌든 이곳에 유다가 찾아왔습니다.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비참한 말씀입니다. 유다가 저들을 데리고 왔다고 요한은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를 지금 잡으려고 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잡으러 오는 것입니다. 잡아 넘겨서 처형하려고 지금 군대와 하속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했던 제자가 주님을 사로잡는, 주님을 잡는 가장 앞자리에 서있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슬픈 이야기, 비극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에서 군대는 성전수비대였습니다. 성전에 왜 수비대가 필요합니까? 그런데 성전에 수비대가 필요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시대에 성전은 로마와 결탁되어 있는 권력의 또 다른 한 근거지였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데 성전을 지키는 수비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속들은 누구입니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하속들이었습니다. 헬라어로 보면 동원된 하속의 숫자들을 우리가 추론해낼 수 있는데, 약 1,000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풀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어떤 이는 최하 200 명은 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지켜야 할 자들은 누구입니까? 성전 그 자체이신, 실체 성전이신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고대하던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지켜야 할 군대들의 반역입니다. 지켜야 할 자는 당연히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도리어 잡으러 왔습니다. 그러니 반역입니다.

 

 

그리고 잡으러 왔던 모습들이 어떤 모습입니까?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요18:3)고 했습니다. 이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십시오. 등을 들고, 홰를 들고 왔습니다. 홰가 무엇입니까? 


횃불입니다. 유월절은 보름달이 뜨는, 환한 대보름 같은 날이었습니다. 보름달은 만월(full moon)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횃불이 없이도 환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횃불을 들고 왔습니다. 

 


헬라에서 등은 진리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헬라 철학자인 디오게네스는 대낮에 등불을 들고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는 “대낮에 등불을 들고 있는데,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진리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등은 진리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횃불은 매우 혁명성이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찾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요한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횃불을 들어 진리의 세계를 높이 알리고 혁명적인 역사를 열어야 할 자들이 그것으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고발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잡아서 죽이기 위해서 등과 홰를 들고 온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병기를 들고 왔습니다. 수색대가 범죄자를 수색하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요한 안에 깊은 슬픔이 배어 있습니다. 자신들의 칼로 주님을 지켜야 할 자들이, 주님을 보호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주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살기가 등등한 증오의 세력들을 보십시오. 그날은 보름달이었는데 그들은 등과 홰를 들고 왔습니다. 유월절은 보름달이 뜹니다. 휘황찬란한 달 밝은 보름에 밖에 나가보십시오. 너무 잘 보여서 모든 것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등과 홰를 들고 왔습니다. 그들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주님을 구석구석 뒤져서 잡아가려고 손에 등과 홰를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협하려고 손에 칼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령 주님을 잡아 가려고 한다고 해도 왜 군대가 필요합니까? 살기등등한 군대가 왜 필요합니까? 하지만 그들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주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맨 앞에는 주께서 사랑하는 제자가 앞장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