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순절 묵상

사순절 십자가의 길 22일

즐거운길 2021. 3. 29. 23:02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 잡히시다 (II)

 

요한복음 18:1-11

 

주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요 18: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주께서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망가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대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올 것을 아시고 진지를 구축하고 병기로 무장해서 대결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다 아셨습니다. 이 말이 매우 충격적인 말입니다. 왜 죽음의 세력 앞에 피하지 않으셨을까요? 이제 남겨진 것은 아신 그 길을 가는 것뿐입니다. 주께서 아셨습니다. 

 


신앙의 길에는 수많은 역경과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용기와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흔들리지 않는 떳떳함과 당당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힘입니다. 주님을 잡으러 온 자들이 등과 홰를 들고 주님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들 안에 비겁함이 있고 간교함이 있습니다. 그들이 왜 등과 홰를 들고 왔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숨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석에 숨어있는 주님을 찾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칼(병기)을 들고 갔습니다. 칼로 위협해서 그를 나오게 해서 잡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주님은 그들에게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하셨습니다.

 

 

 

 

[요 18:5-6]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바로 “내가 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앞에 주님을 잡으러 온 자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너무도 당당했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가슴 떨리게 기록했습니다. 


“내로라. 나다. 너희가 찾는 자가 여기 있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의 세력 앞에 모습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다른 길로 가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맞서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을 드러내셨습니다. 자신을 찾으러 온 자들에게 “너희가 찾는 자가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그들에게 당당하게 “내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기대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 모습에서 그들은 다 엎드려졌습니다. 넘쳐나는 주님의 영적인 권위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놀라운 영적인 권위로 말미암아 저들이 다 엎어졌습니다. 

 

 


본문에서 요한이 이야기하려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요한은 이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신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요한은 이 기록을 통해 주께서는 잡히신 것이 아님을, 세상의 힘과 간교한 수색의 작전과 과정 속에서 잡혀서 끌려가신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다 지고 걸으셨던 속죄양의 길, 고난의 종의 길을 주께서도 스스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당당히 십자가의 길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증거, 가슴 떨리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통곡하며 떠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사랑이 가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게 하신 사연,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 믿음이 죽음의 세력을 삼켰습니다. 주님은 당당했습니다. 도리어 잡으러 오는 자가 엎어졌습니다. 

 

 

 

[요 18:7-8]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주님은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위기의 순간에서도 제자들을 끝까지 보호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먼저 보호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짐을 홀로 지고 가시는, 제자들의 모든 몫까지도 다 지고 가시는 놀라운 세계를 요한은 그리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가는 길을 용납하라.”는 말씀 속에서 죄의 역사를 청산하고 모든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지고 가셨던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 18:9-10]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베드로에게는 이 세상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세상적인 용기가 있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받는 그 범죄자의 동조자가 받는 죄값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베드로가 왜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봐야 합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용기가 있습니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리고 수많은 적들로 포위된 위협 속에서, 도저히 싸워서 승리할 수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베드로처럼 칼을 빼고 대결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의 놀라운 용기입니다. 주님을 지키려는 용기입니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베드로는 주님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위대한 용기입니까? 쉽지 않는 결단과 행동입니다. 홀로 수많은 살기등등한 군대와 하속들과 칼을 빼서 대결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주님을 지키려는 결의가 있었습니다. 

 

 


[요 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탁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삶을 맡기시고 하나님의 능력에 온 몸을 다 맡기시는 위대한 믿음의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여기 잊어버릴 수 없는 두 영상이 있습니다. 지울 수 없는 두 영상이 있습니다. 두 가지의 용기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적인 용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위대하고 빛나는,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모든 삶을 맡기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그리스도의 믿음의 용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잔을 내가 왜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잔은 어떤 잔입니까? 고난의 종의 예언에 대해서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레위기 16 장, 이사야 53 장에 속죄의 길,  대속의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요 1:29)라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외쳤던 말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갔던 어린양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바울은 이 속죄 의식에 대해 깊이 다루었습니다. 로마서 5 장 17 절을 보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히브리서 2 장 14 절을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사망으로 사망을 잡은 자가 마귀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이 우주적인 대속(cosmic redemption)의 사건으로서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주신 잔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속죄양으로서의 죽음입니다. 죽음보다 더 깨끗한 청산, 더 완벽한 정리가 있습니까? 죄가 왕 노릇했던 세계 가운데 죄의 모든 것들을 다 이기시고, 죽음으로 죽음을 청산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여신 것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하신 말씀을 깊이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는 이 말씀이 깊이 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야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열려진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역사의 일대 전환이 온 것입니다.